[스크랩] <신데렐라> 고전은 괜히 고전이 아니다

2015. 4. 12. 22:23스크랩 세상



8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인어공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장편 애니메이션이 유명 동화를 원작으로 삼는 것은 당연시되는 트렌드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주춤하고 드림웍스가 <슈렉>으로 인기 고공행진을 달리면서, 그때부터는 유명 동화 원작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어떻게든 비틀어 보는 것이 당연시되는 트렌드가 되었다. 디즈니는 그렇게 자신들이 단단한 기반을 구축한 문화의 트렌드에서 멀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후 절치부심한 디즈니는 <라푼젤>, <겨울왕국>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무조건적인 패러디보다 고전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캐릭터를 시의성 있게 진보시키는 또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냈다. 낭만과 현실인식이 적절히 조화된 모습은 경쟁사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힘든, 동화 기반의 콘텐츠에 수십년간 능했던 디즈니여씩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 결과 현재 전세는 또 10년 전과 정반대가 되었다.)


그렇게 디즈니가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그들은 자사에서 나온 클래식 애니메이션을 실사 영화로 옮기는 시도를 한다. 약 20년전 <101마리 달마시안> 등을 통해 시도된 바 있지만 훨씬 더 큰 규모로, 1년에 한 편 꼴로 추진되면서 작년 <말레피센트>가 나왔고 올해에는 <신데렐라>가 나왔다. <말레피센트>는 원톱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에게 '악역' 말레피센트를 맡기면서 원작의 극적인 전복을 시도했는데, 이는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들이 일군 고전 원작의 가치를 일정부분 부정하는 건가 싶은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도 안 돼 나온 <신데렐라>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런데 이런 정직한 작법에서 생각지 못한 반전이 생겼다. 이게 우려처럼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기품있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데렐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고전적이라 오히려 새롭다.




옛날 옛적에 어느 왕국 안에 엘라(릴리 제임스)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행복도 잠시, 엘라를 몹시 아꼈던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월이 지나 엘라가 어엿한 숙녀가 되었을 즈음, 엘라의 아버지는 엘라의 새엄마와 의붓자매를 집안에 들임으로써 새 삶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렇게 엘라는 새엄마인 트레멩 부인(케이트 블란쳇)과 의붓자매 아나스타샤(홀리데이 그레인저), 트리젤라(소피 맥쉐라)와 가족이 되지만, 그들의 기가 여간 세 보이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새엄마와 의붓자매들은 아니나다를까 본색을 드러내고, 엘라에게 '신데렐라'(재투성이 엘라)라고 불러가며 그녀를 하녀 취급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엘라는 어머니가 유언으로 남긴 '용기'와 '친절한 마음'이라는 가치를 잃지 않고자 노력하고, 그런 그녀의 선량함은 우연히 숲속에서 만난 (미처 왕자일 거라곤 예상 못한) 키트(리처드 매든)를 매료시키기에 이른다. 이름도 알지 못한 채 헤어진 엘라를 또 만나고 싶은 나머지 키트 왕자는 자신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예정된 무도회에 신분을 막론한 모든 처녀들을 참석토록 하지만, 트레멩 부인과 의붓자매들은 엘라의 무도회 참석을 원천차단시켜 버린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엘라 앞에 상상 속에나 있는 줄 알았던 요정 대모(헬레나 본햄 카터)가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엘라는 마침내 눈부신 공주의 모습으로 왕자의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신데렐라>를 실사 영화로 옮기면서 감독을 케네스 브래너로 낙점한 것은 결과적으로 적절한 선택이 되었다. 최근엔 <토르:천둥의 신>, <잭 라이언:코드네임 쉐도우> 등의 블록버스터들을 연이어 연출했지만, 사실 그는 잘 알려진대로 '셰익스피어극의 귀재'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많이 만들었고 출연도 많이 한 만큼, 고전극의 품격을 재현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기대에 걸맞게 그는 실사영화 <신데렐라>를 낯간지러운 아동용 판타지 동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작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러디물도 아닌 고전적인 러브스토리이자 성장담에 가깝게 그려냈다. 캐릭터들의 심리와 관계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관찰한 시나리오, 전형적인 캐릭터임에도 또 수긍할 수 밖에 없게 생기를 불어넣는 배우들의 연기, '동화 속 세상'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싶을 정도로 상상했던 풍경을 미적으로 극대화한 장대하고 우아한 비주얼. 이런 요소들을 결합해 익히 알려진 원작 이야기의 전형성에 주눅드는 대신,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 이미지를 '고전의 우아한 품격' 이미지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야기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만큼 기대했을 시각효과의 구현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아이맥스 화면으로 본 왕궁의 위엄 넘치는 전경, 호박이 마차로 변하고 생쥐가 말로 변하고 거위와 도마뱀이 마부와 시종으로 변하는 모습, 무도회 드레스의 변신과 유리구두의 등장, 신데렐라와 왕자의 첫 춤 같이 볼거리가 강조된 장면에서는 풍광이나 색감이 찬란하게 스크린을 꽉 채우는 고전적인 스펙터클이 느껴진다. 신데렐라의 무도회 드레스, 유리구두와 같은 핵심 아이템들은 중요도에 걸맞은 미적 존재감을 발휘하고, 신데렐라가 평상시 집에서 입고 있는 낡은 드레스마저도 은은한 풍미가 느껴진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어물쩡 넘어가지 않고 장면장면의 정서를 극대화함으로써 새삼 마음이 감동하거나 쫄깃하게끔 만들기도 하는데, 어린 나이에 신데렐라가 맞이하는 부모와의 이별, 12시 종이 울리며 신데렐라가 무도회에서 긴박하게 빠져나오는 장면 등이 그렇다. 반드시 거칠 이야기임을 알고 보는데도 새삼 슬프고 새삼 긴장되니 말이다. 이런 '새삼스런 몰입'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매듭지어지는 후반부에까지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 <신데렐라>는 작년에 나온 <말레피센트>와 달리 일단 뒤집고 보자는 식으로 이야기이나 시점을 전복하지 않는다. <신데렐라>는 그 대신 이야기에 디테일을 부여한다. 우리가 고전 동화를 전형적이고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내용을 대부분 세세하게보다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게 적지 않다. '왜', '어떻게'가 사라진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왕자 만나 팔자 펴는 이야기'는 당연히 식상하고 고루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간파했는지 <신데렐라>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속 결과에 과정, 원인을 곁들임으로써 고전적 이야기에 꽤 수긍할 만한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신데렐라를 태생이 착한 소녀로 그리기 보다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떤 가치관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고, 계모를 원래 못된 인물로 그리기 보다는 왜 그녀가 신데렐라를 그렇게 구박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며, 왕자가 정말 알던 대로 일면식도 없던 신데렐라를 무도회장에서 처음 보고 반한 건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신데렐라가 본명인 '엘라'와 더불어 왜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연유까지 보여줄 정도다.




사람의 성격과 감정이 생겨나고, 사람 간의 관계가 생겨나는 과정에 대한 에피소드가 곁들여지면서 <신데렐라>는 의외로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동화'가 아니게 되며, 영화 속 대사처럼 꿈을 이루는 데 각자의 마음과 꿈, 거기에 '약간의 마법'만이 곁들여졌을 뿐인 이야기가 된다. 이런 디테일 덕분에 <신데렐라>는 '마냥 착하기만 하고 예쁘던 소녀가 운 좋게 왕자님의 눈에 띄어 출세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끝까지 놓지 않고 지켜낸 마음으로 결국 타인을 감동시키고 사랑과 행복을 얻어낸 이야기'로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데렐라> 속 신데렐라는 타인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보다, 스스로의 성품과 가치관으로 운명을 자기 편으로 이끌어낸 능동적 여성이 된다. 신데렐라를 무도회장에 보낸 마법도, 평범한 이 '시골 소녀'를 반려자로 맞아들인 왕자의 결단 또한 그녀의 이런 가치를 누군가가 알아본 결과일 뿐인 것이다.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전해듣고 마음에 새긴 덕목인 '용기'와 '친절한 마음'은 그런 신데렐라의 능동성이 형성되는 데 아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용기'와 '친절한 마음'이 양립하는 그녀의 가치관은 '수동적인 착함'이 아니다. 만약 '친절한 마음'만을 추구했다면 속 없이 자신의 모든 걸 내 줄 수도 있었을 신데렐라의 성품은 '용기'를 함께 추구하면서 무조건적인 '착함 강박증'에서 벗어난다. 그 용기라는 것은 불의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일 수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상황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의지일 수도,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할 줄 아는 정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반대로 '용기'만을 추구했다면 분별력을 잃고 막무가내였을 수도 있었을 신데렐라의 성품은, '친절한 마음'을 함께 추구하면서 배려의 미덕까지 함께 쌓게 되기도 한다. 이렇듯 신데렐라의 선량한 성품을 보다 구체화, 주체화시키는 '용기'와 '친절한 마음'이란 가치는 분명 전통적인 가치관임에도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고 균형이 잡혀 있기에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호소력 있게 다가갈 만한 가치일 것이다.




신데렐라 역을 연기한 신예 배우 릴리 제임스는 영상으로 볼 때가 훨씬 아름답다. 스틸컷이나 예고편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 신데렐라의 이미지 치고 좀 강단 있는 느낌의 외모가 아닌가 싶었던 릴리 제임스는 그러나, 막상 본편에서 선량함과 순수함, 그 가운데 사라지지 않는 용기를 화사한 미소로 보여주어 무척 만족스럽다. 집에서 한창 구박당할 때 입고 있는 분홍빛 누더기 드레스에서나, 요정 대모의 도움으로 장만한 화려한 무도회장 드레스에서나 일정한 수준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왕좌의 게임> 출신으로 <신데렐라>에서 왕자 키트를 연기한 리처드 매든도 영화 속에서 보기보다 훤칠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각같은 외모는 아닐지라도 캐릭터의 건강한 성품과 로맨틱함이 묻어나는 연기 덕에 여성 관객들도 흡족할 것으로 보인다. 등장하는 내내 타이트한 그의 하반신 의상은 여성 관객들의 시선을 특히 사로잡을 듯 하다. 한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는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이 맡은 계모 트레멩 부인을 역시나 그냥 연기하지 않는다. 악마적이기보다는 속물적이며 우스꽝스럽고, 때로 경박하기까지 함에도 어떤 순간에는 '신데렐라 계모'의 수준을 넘어서는 우아함을 발산한다. (언뜻 언뜻 <블루 재스민> 속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그녀에게 살며시 다가가 "댁의 따님들보다는 댁이 직접 왕자를 유혹해 보시는 게 어떤지..."라고 귀띔하고 싶을 정도다. 더불어 비중은 거의 특별출연 수준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발랄하고 믿음직한 요정 대모의 모습을 특유의 비범한 아우라를 곁들여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도 명불허전이다.


'용기와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에 '요즘 세상이 그렇게 순진할 줄 아느냐'며 핀잔을 주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 소리 들어야 할 대상을 꼽는다면 이런 옳은 가치를 전하는 이보다는 이런 옳은 가치를 무력화시키는 요즘 세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갖은 동화의 비틀기에 적잖은 사람들이 피로하게 된 것은, 비록 빤하다 할 지라도 세상 시름 잠시 내려놓고 책 읽어주는 어른의 품에 안기듯 의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즈니의 <신데렐라>는 세상사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어렸을 적부터 익히 들어온 동화들마저도 열심히 비틀어보려 했던 우리들에게 모처럼 그 옛날 옛적 이야기 그대로 돌아와 어깨를 빌려주며 위안을 준다. 다 아는 이야기를 또 도돌이표로 읽기보다 세심하게 풀어냄으로써, 고전이 고전이라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음을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증명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시도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본디 가치를 잃지 않고 지켜내는 것. 그래서 디즈니는 반백년을 훌쩍 넘은 전통의 스튜디오이지만 여전히 앞날이 창창해 보인다.


+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 말미에 요정 대모가 귀에 익은 옛날 그 마법 주문을 읊어주는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크레딧 다 안 보고 금방 나가버리면 요정 대모가 서운해한다.

출처 : Man`s Labyrinth
글쓴이 : jimman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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